노무현전 대통령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야야]1001, 1002, 1003이라는 숫자가 떠오르는 요즘 :: 2008/05/26 18:29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672506

위 글을 읽고 떠오른 서울시경 기동단에 대한 불쾌한 기억.

96년 이후 학생운동이 (여러 의미에서)위기에 처했을 무렵, 경찰의 불법적인 시위진압은 학생들의 시위가 '불법,폭력시위' 였기 때문에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 분위기 였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누가 원인 제공을 했는가는 아무리 못해도 '닭이 먼저, 알이 먼저' 수준이니 일단 제쳐두도록 하자.

갈등이 심화되고 충돌이 거세지면서 양측 모두 과격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생들의 시위는 80년대에 비춰 봤을 때 덜하면 덜했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시대 상황에 비추어 봤을때 학생들의 시위 수준은 과격하다고 평가 받았다. 80년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분을 인정 받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여론은 불리했고, 이를 틈타 경찰들의 무력은 과격해졌다. 학생운동권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명분 없는 시위에 쇠파이프, 화염병을 가지고 나온 학생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당시의 여론이었으니까. 내 기억에 학생 시위에서 쇠파이프, 화염병이 등장했던 경우는 정권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90년대 중후반이라 하더라도 일년에 기껏해야 한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어차피 언론에 등장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고 아무리 실상이 과장되고 과대 보도 되었다 하더라도 학생들은 지지 받지 못했었다. 동의 받지 못한 '명분' 때문이었다.

96년 연세대 노수석군의 사망 이후 김영삼 정권과 학생운동 세력이 격렬히 충돌하면서 위와 같은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정확히 일년 후 97년 조선대 류재을군이 시위 중 사망하는 사건이 또다시 벌어졌다. 그리고 경찰 측에서 '도리깨봉, 쌍절곤'이라는 것이 등장했었다.
(관련 기사 http://h21.hani.co.kr/hankr21/K_974A0152/974A0152_054.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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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쌍절곤, 도리깨봉'을 들고 있던 90년대 중후반 진압 경찰의 모습. 오른쪽 사진의 왼쪽 위에 보이는 모습은 시위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안보이지만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겠죠. 경찰이 과격했다는 얘기만을 하려는게 아니니 당시의 상황을 가급적 정확히 인식하시길 바라는 심정에서 이 점을 밝힙니다.



광주에서 볼 수 있었던 진압 경찰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저렇게 만들면 곤봉으로 가격할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난데다가 줄로 연결된 단봉으로 시위대의 다리를 휘감아 끌고 가는 것이 가능했다고 했었다. 게다가 일부의 경우 단봉 없이 긴 철사만 장봉에 연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경우 시위대는 곤봉 끝에 연결된 철사를 보기 어려웠던데다가 옷 위로 맞더라도 살갗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을 수 있었기에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개의 경우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지면 그 지역(구 별로 있는) 경찰서에서 진압경찰이 출동했었다. 이들은 학생들과 충돌이 벌어져서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것 자체를 기피했었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충돌 자체를 꺼려 했었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학교단위의 시위에서는 하고 싶어도 폭력시위를 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맨몸으로 나가서 기껏해야 몸싸움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큰 충돌을 바라지 않는 심정은 그들과 마찬가지 였기에 이런 시위는 대부분 큰 충돌 없이 마무리 되곤 했었다. 적어도 9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이 철저히 고립되기 전까지는.

그러던 97년 어느날. 기껏해야 몸싸움 정도만 하고 마무리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학교 단위의)집회였었다. 교문 바깥에서 도로 일부를 점거했다가 밀려나는 신경전이 몇번 벌어졌었다. 그날 시위대는 거의 모두 맨몸이었고 십여명 정도의 학생들만 각목, 그것도 시위용이라기 보다는 사전집회에서의 행사용으로 사용했던 사람 팔 길이 보다도 짧았던 각목을 들고 있었다. 각목을 바닥에 데고 있으면 허리가 꾸부정해지는, 마치 상주들이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 값으로 상중에 짧은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피지 않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될 듯 하다. 그러다 평소에 안보이던 이들이 나타났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요즘 말로 '간지'나는 모습이라고 할까. 평소 보던 진압경찰들에 비해 체격도 좋은데다가 약간 짙은색의 진압복을 입은 경찰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학생들의 시선을 끌게 된 또다른 이유는, 대개의 진압 경찰들이 줄을 맞춰서 방패를 들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이들은 줄도 제대로 서 있지도 않았었고 방패는 다리 옆에 아무렇게나, 곤봉은 어깨 위나 곤봉 끝이 바닥에 닿게 아무렇게나 대충 들고 서있었다. 소위 말해 '삐딱한' 모습으로 무리 지어 있었다. 껌을 씹고 있었다면 아주 어울렸을 그런 모습. 그리고 또 한가지, 그들 중 일부가 들고 있던 장봉의 끝에는 철사가 매달려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당시 류재을군의 사망 때문에 격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광주에서만 볼 수 있었다는 그 무기를 들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위대를 위축시켰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은 제대로 '깨졌다'. 손발이 찢어진 학생들을 부지기수 였고  두개골 함몰, 안면 골절, 코뼈 골절 등의 부상을 당한 학생들이 여럿 있었을 정도였으니.

나중에야 '그들'이 서울 기동대 소속이라는 말을 들었다. 학생들이 쇠파이프나 화염병을 들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까지 저런 폭력을 휘두른 경찰들의 행위는 학생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었다. 비슷한 일련의 사건(아는 선배 한명은 뇌수술을 받기까지 했었다. 학내 집회에까지 쳐들어온 진압 경찰이 휘두른 곤봉 때문이었다)들을 통해 김영상 정권에 대한 분노를 한층 키운 학생들의 시위의 폭력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단계 더 과격해지고 이후 대중, 여론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는 빌미를 제공했었다.

야간 시위에서 볼 수 있던 최루탄이 그리는 불꽃의 궤적이 포물선이 아닌 직선이 되는 일은 일상이었다. 몇개의 직선의 궤적이 선두 대열을 흩트려 놓은 이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체 다른 학생들에 안겨 후송되던 학생의 손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목격한 바로 그 다음날, 진압 경찰중 한명이 시위대에 밀려 후퇴하던 경찰 차량에 압사 당하는 사고가 벌어졌었다. 이를 발견하고 쓰러져 있는 경찰 주위에 서서 구급차를 부르던 선두에 있던 시위대의 모습은 다음날 신문에 '쇠파이프 폭력'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가 되었다. 그리고 학생운동 세력은 며칠 후의 프락치 치사 사건으로 자멸하고 결국 패배했다.(여러 원인이 있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사건이 계기가 된 점은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을 되내이고 있었지만 김영삼 정부에 대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격한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던 9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지만 96년, 97년 연속된 학생들의 사망 사건으로 분노가 극에 달했던 학생운동이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기에는 무리였던 듯 하다. 이것이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불렀고 단지 김영삼 정권과의 '투쟁'에만 몰두하게 되버린 것이, 정권 말기 신한국당내에서조차 '하야설'이 나올 정도로 부패하고 무능했던 김영삼 정권을 상대로 한 투쟁임에도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 최루탄 사용이 금지된 이후 서울 1 기동대 1001, 1002, 1003 중대의 공격적 시위 진압이 논란이 될 때 마다 그 당시의 기억이 가끔씩 떠오르곤 했었다.

그리고 90년대의 학생 시위의 기억 자체가 대중들에게서 철저히 잊혀져서 '90년대에 학교를 다녔었는데 시위 한번 본 적 없었다'는 말이 종종 들리는 2008년 요즘, 기껏해야 방패에 몸을 기대 버티는 정도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이 90년대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에 악명을 떨쳤던 1001, 1002, 1003 이라는 숫자가 찍힌 방패를 들고 있던 그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면서 이 불쾌한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10년 전도 아닌 지금 이 시기에 왜 그런 모습이 보여야 할까. 시위대가 쇠파이프를 휘둘렀던 것도 아니고 화염병이나 돌을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경찰들의 모습은 쇠파이프를 휘둘던 10년전의 시위대를 때려잡던 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일까.

경찰들의 그런 모습이 기억에 박혀 있어서 그리 생소하지 않은 나에게 조차 이 시대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경찰들의 시위 진압 모습은 8, 90년대 권위주의 정권의 모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체 며칠전 고개 세번 숙이기 쇼로 '국민과의 소통 없음'을 선언한 이명박 정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겠지. '잃어버린 10년' 동안 그들은 절치부심하며 왕년의 기량을 갈고 닦고 있었나 보다.

10년전 변화해야 할 시기에 변화할 방법을 몰랐던 운동권들이 몰락했듯이 변화가 요구되는 이천년대 후반에 10년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수정권은 몰락할 것이다.


* 당시 논란이 되었던 1001, 1002, 1003 중대의 시위 진압 모습(사진, 동영상 포함)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18799



**추부길 청와대 홍보 비서관이 집회 현장에 나와 있었다는 군요.

십여년전 신한국당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 중요 집회때 청와대 관계자가 현장에 와서 경찰 지휘관들을 만나고 갔다는 소문이 돌고나면 어김없이 경찰의 강경진압이 시작됐었죠. 10년전과 어쩌면 이리도 똑같을 까요. 그나저나 이 인간, 외국 대학에서 '한글'로 쓴 박사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 받아 놓고 '운하 전문가'를 자처했던 그 사람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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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왼쪽에 양복 입고 바지 주머니에 속가락 찔러 놓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
관련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289647.html


***십년, 이십년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점 한가지 더.

촛불 '문화재'에는 유연하게 대처하고 '가두 시위' 참가자는 엄중 처벌하겠다고 한다. '가두 시위'는 치밀하게 준비되고 조직되었으며 배후세력이 의심된다고 한다. 문화재가 가두시위로 '변질' 되었다고 한다. 대화는 커녕 '배후세력'을 강조해서 도덕성에 흠집내고 '과격파' 딱지를 붙여서 시위 집단을 이간질 하고 분리하여 힘을 빼놓으려는 저 뻔하디 뻔한 책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니네들 지난 십년동안 준비한게 이거냐?

2008/05/26 18:29 2008/05/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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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 2011/05/27 10:44 | PERMALINK | EDIT/DEL | REPLY

    90년대 중후반이후 학생시위에서 쇠파이프가 나온게 일년에 한두번이라니... 웃고갑니다

    • ?? | 2011/06/08 15:41 | PERMALINK | EDIT/DEL

      본문 어디에도 한두번이라는 표현은 없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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